교토의 탄생 — 헤이안쿄에서 사무라이의 도시까지

교토 역사를 공부하다가 숫자 하나에 눈이 딱 멈췄어요. 794년부터 1869년까지, 무려 1,075년 동안 일본의 공식 수도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서울 시리즈를 쓰면서 조선의 한양이 500년 넘게 도읍이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교토는 그 두 배가 넘는 시간 동안 한 나라의 심장 역할을 했던 거예요. 게다가 그 사이 한반도에서는 신라, 고려, 조선이 차례로 들어섰고, 중국에서는 당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교토만은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게 정말 놀라웠습니다. 오늘부터 2편에 걸쳐, 이 천 년의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함께 걸어볼게요.

교토 역사 헤이안쿄 일본 천황

장안을 본떠 만든 도시 — 헤이안쿄의 탄생

교토가 처음부터 일본의 수도였던 건 아니었어요. 원래 일본의 수도는 나라(奈良)였습니다. 이후 구니쿄, 나가오카쿄로 몇 번 옮겨졌다가, 794년 간무 천황이 마침내 새로운 도읍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헤이안쿄, 지금의 교토였어요.

흥미로운 건 이 도시의 설계 방식이에요. 헤이안쿄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어졌습니다. 동서로 4.5킬로미터, 남북으로 5.2킬로미터에 이르는 격자형 도시 구조를 갖췄고, 도로 하나하나에 체계적인 주소 체계를 부여했어요. 가장 넓은 주작대로는 폭이 무려 84미터에 달했다고 합니다. 지금 서울의 왕복 8차선 도로보다도 넓은 길을, 1,200년도 더 전에 만든 거예요.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파리 시리즈를 쓸 때 다뤘던 오스만의 도시개조가 떠올랐어요. 넓은 대로를 계획적으로 배치하는 발상이, 19세기 파리보다 무려 천 년이나 앞서 이 헤이안쿄에서 이미 시도됐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도시를 계획적으로 설계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인류의 지혜였던 거죠.


왕조가 바뀌지 않는 나라 — 일본 천황이라는 특별한 존재

교토가 1,075년이나 수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를 공부하면서, 저는 일본 천황이라는 존재의 독특함에 눈길이 갔어요.

우리나라나 중국은 역사적으로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죠.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서울 시리즈에서 다뤘듯, 나라가 바뀌면 수도도 함께 옮겨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어요. 그런데 일본은 조금 다릅니다. 왕조 교체, 그러니까 혁명이 거의 없는 나라예요.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내란이 일어나고 실권을 잃은 시절에도 그 존재 자체는 신성불가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실질적인 정치 권력이 무사 계급, 즉 사무라이들의 막부로 완전히 넘어간 뒤에도, 천황이 교토에 머무는 한 교토는 계속 ‘수도’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예요. 권력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 상징적인 중심은 그대로 남아있는 구조였던 셈입니다.

이 부분이 참 인상 깊었어요. 서울은 권력의 실체와 상징이 늘 함께 움직였던 도시였는데, 교토는 그 둘이 분리된 채로도 천 년을 버텼다는 거잖아요.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도 얼마나 다른 역사의 결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해줬습니다.


화려함 뒤에 숨은 그늘 — 헤이안 시대의 빛과 어둠

794년부터 1185년까지를 일본사에서는 헤이안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는 일본 문학과 예술이 꽃피운 황금기로 유명해요. 귀족 여성들이 쓴 일기 문학, 정교한 궁중 예법, 지금도 일본 창작물의 단골 소재가 되는 화려한 궁중 문화가 이 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치열한 권력 다툼도 있었어요. 후지와라 가문이 신하로서는 최초로 셋쇼(섭정)라는 자리에 올라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고, 이후 여러 명문가들이 정치적 부침을 겪었습니다. 학자였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정적의 모함으로 좌천당한 사건은 지금도 일본에서 유명한 이야기예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선 시대 사화(士禍)들이 떠올랐어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화려한 문화가 꽃필 때 그 이면에는 늘 정치적 암투가 함께 있었다는 게, 역사를 여러 도시로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귀족의 시대가 저물다 — 사무라이의 등장

헤이안 시대 후반, 조정의 권력 다툼 속에서 지방의 무사 세력이 서서히 힘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두 무사 가문,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의 대결로 이어졌어요.

1183년, 다이라 가문이 교토를 버리고 서쪽으로 후퇴하면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교토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어진 겐페이 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2년 정이대장군, 즉 쇼군에 임명되면서 가마쿠라 막부가 문을 열었어요. 이때부터 정치 권력은 완전히 사무라이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렇게 실권이 무사 계급으로 넘어갔는데도 교토는 여전히 일본의 공식 수도로 남아있었다는 거예요. 정치의 중심은 가마쿠라로 옮겨갔지만, 천황과 조정이라는 상징적 권위는 여전히 교토에 있었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일본 특유의 이원적 구조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서울을 떠올렸어요. 조선의 한양은 왕이 곧 실질적인 통치자였고 그 도시가 곧 권력의 중심이었잖아요. 그런데 교토는 이때부터 형식적인 수도와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이 완전히 갈라지는, 아주 독특한 도시가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교토의 첫 페이지를 걷고 나서

교토 시리즈 1편을 쓰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도시가 오래 살아남는 방식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로마는 강력한 제국의 힘으로, 서울은 권력의 실체와 상징이 함께 이어지며 살아남았다면, 교토는 상징적 권위 하나만으로도 천 년 넘게 ‘수도’라는 이름을 지켜낸 도시였습니다.

지금까지 세계 여러 도시를 공부하면서 늘 느꼈던 게, 결국 모든 도시는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 있다는 거예요. 교토는 힘이 아니라 상징으로 버텨온 도시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다룬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도시가 오닌의 난으로 잿더미가 됐다가, 어떻게 지금 우리가 아는 그 아름다운 고도(古都)로 다시 살아남았는지 이야기해볼게요.


다음 글: 교토의 기억 — 근대화의 파도를 넘어 살아남은 도시 (시리즈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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