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에서 서울로 — 격변의 100년을 걷다

지난 두 편에서 위례성부터 조선의 600년 도읍 한양까지 걸어봤다면, 이번엔 서울 근현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시간을 걸어볼 차례예요. 그런데 사실 저에게 가장 마음이 많이 가는 건 이번 3편이에요. 지금 제 부모님 세대가 직접 겪은 시간이고, 제가 태어나기 전이지만 부모님 입을 통해 어릴 때부터 조금씩 들어온 이야기들이거든요. 조선의 수도 한성이 어떻게 경성이 되고, 폐허가 됐다가, 지금의 서울이 됐는지. 오늘은 그 격변의 100년을 함께 걸어볼게요.

서울 근현대사 경성 한강 야경

이름을 빼앗긴 도시 — 한성에서 경성으로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한성(당시 공식 명칭)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외국 공사관이 들어서고, 전차가 놓이고, 전기가 들어왔어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도시의 근대적 모습들이 이 시기에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1910년, 한일 합방과 함께 이 도시는 큰 상처를 입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한성부’라는 이름을 강제로 ‘경성부‘로 바꿔버린 거예요. 발음도 일본식인 ‘게이조’로 부르게 했습니다. 500년 넘게 조선의 수도였던 도시가, 하루아침에 이름조차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처지가 된 거예요.

저는 이 대목에서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어요. 지금까지 로마, 이스탄불, 베를린 같은 도시들이 정복당하고 이름이 바뀌는 이야기를 여러 번 다뤘는데, 그건 다 남의 나라 이야기였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제가 태어나고 자란 이 나라, 이 도시의 이야기라는 게 완전히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이 될 때, 저는 그저 흥미로운 역사로 읽었어요. 그런데 한성이 경성이 되는 순간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일제강점기 동안 서울은 기형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몰려 살던 남대문로, 을지로, 충무로 일대는 도로와 구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했지만, 한국인이 많이 살던 종로 북쪽 지역은 개발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같은 도시 안에서도 어느 쪽에 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거죠. 1936년에는 도시가 4배로 확장됐고, 1944년 인구는 100만 명에 육박했지만, 그 성장의 열매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름을 되찾다, 그리고 잿더미가 되다 — 해방과 한국전쟁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경성부는 그해 서울시로 개칭됐어요. 흥미로운 건, 이때 왜 하필 ‘서울’이라는 이름을 다시 썼는가 하는 부분이에요. 1편에서 말씀드렸듯 ‘서울’은 원래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였는데, 미군정 시기에 이 말을 정식 지명으로 채택했습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부르는 ‘서울’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은 거예요.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승격됐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서울은 전쟁 기간 동안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어요. 북한군에 점령됐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됐다가, 다시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는 이른바 1·4 후퇴를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됐어요.

저는 이 대목을 쓰면서 부모님 세대 이야기가 자꾸 겹쳐 보였어요. 어릴 때 할머니께서 피난 다니시던 이야기를 몇 번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그냥 ‘옛날이야기’로 흘려들었는데, 지금 이렇게 자료를 찾아보면서 그게 얼마나 처참한 시간이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로마 폐허나 베를린 공방전 사진을 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에요. 그건 먼 나라 역사책 속 이야기였지만, 이건 제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직접 겪은 일이니까요.

전쟁 이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됐던 시절, 서울 전재 부흥 계획이라는 것도 세워졌다고 해요. 하지만 그 계획이 실질적으로 크게 적용되지는 못했습니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15년은 해방의 혼란과 전쟁의 파괴가 겹친, 우리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기였어요.


잿더미 위에 다시 세운 도시 — 한강의 기적과 서울의 팽창

1960년대부터 서울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현대 도시로 부상하기 시작한 거예요.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시가지가 한강 이남까지 확산됐고, 영등포, 영동(지금의 강남), 잠실 같은 부도심들이 하나둘 형성됐습니다.

1편에서 말씀드렸던 그 잠실, 백제의 첫 도읍 위례성이 있던 바로 그 땅이, 이번엔 현대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어요. 2천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땅이 두 번이나 도시의 심장 역할을 하게 된 셈이죠.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소름이 돋더라고요.

이 시기 서울의 성장 속도는 정말 눈부셨습니다. 불과 몇십 년 만에 폐허였던 도시가 마천루가 들어선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어요. 저희 부모님 세대가 흔히 하시는 말씀 있잖아요. “우리 어릴 때는 여기가 다 논밭이었어.” 그 말이 그냥 어른들의 흔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서울이 걸어온 압축적인 시간을 그대로 담고 있는 증언이었다는 걸 이번에 새삼 느꼈습니다.


세계에 다시 보여준 도시 — 1988년 서울올림픽

이 격동의 성장을 전 세계에 증명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이에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도시가, 불과 30여 년 만에 세계인이 모이는 올림픽을 개최할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잠실종합운동장을 중심으로 열린 이 대회는 서울이 국제사회에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는 걸 보여주는 무대였어요.

저는 서울올림픽 당시엔 아직 어렸지만, 그 시절 분위기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은 남아있어요. 온 나라가 들썩였던 그 열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한 스포츠 축제가 아니라 폐허에서 다시 일어선 도시와 나라 전체가 세계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였던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베를린의 폐허, 리스본의 대지진처럼 세계 여러 도시들이 파괴와 재건을 겪었던 걸 이 블로그에서 계속 다뤄왔는데, 서울의 재건도 그 못지않게 극적인 이야기였다는 걸 이번에 제대로 느꼈습니다.


3부작을 마치며 — 2천 년 도읍의 시간을 걷고 나서

서울 시리즈 3편을 모두 쓰고 나니, 묘한 감정이 듭니다. 지금까지 로마, 파리, 베를린, 이스탄불, 아테네처럼 유럽과 세계 곳곳의 도시 역사를 써오면서 늘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었어요. 그런데 서울은 다릅니다. 지금 제가 발 딛고 사는 곳이고, 매일 출퇴근하며 지나는 길이고,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가 있는 곳이니까요.

위례성의 백제 사람들, 한양을 세운 정도전과 무학대사, 경성 시절을 견뎌낸 사람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다시 도시를 일으킨 부모님 세대. 이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쌓여서 지금 제가 걷는 이 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2천 년이라는 시간이, 위례성에서 시작해 한양을 거쳐 지금의 서울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게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부분이었습니다.

앞으로 로마의 포로 로마노를 걷든, 파리의 센강을 걷든, 이제 서울 거리를 걷는 마음가짐도 달라질 것 같아요. 다른 나라 역사에 감탄하기 전에, 먼저 제가 사는 이 땅의 시간부터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서울의 2천 년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또 다른 도시의 시간을 찾아 떠나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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