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파리가 작은 섬, 시테섬에서 시작해 프랑크 왕국의 수도가 되는 과정을 함께 봤었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파리, 그 우아한 직선 대로와 통일된 건물들이 가득한 풍경은 사실 의외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혁명 파리의 격동을 거치고, 한 사람의 손길을 거쳐서야 지금의 모습이 완성됐거든요. 오늘은 그 격변의 시간을 함께 걸어볼게요.

빵 한 조각의 무게 — 혁명 전야의 파리
1789년 여름, 파리는 폭발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훨씬 절박한 문제가 있었어요. 바로 굶주림이었습니다.
1788년 극심한 가뭄과 우박, 거기다 이상 저온까지 겹치면서 프랑스 농업은 끔찍한 흉작을 맞았어요. 파리 노동자들의 하루 수입은 평균 30수였는데, 주식인 빵값이 두 달 사이 최소 두 배로 뛰었습니다. 일부 지방은 네 배까지 올랐다고 하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던 거죠.
여기에 정치적 불씨가 더해졌습니다. 루이 16세가 시민들에게 인기 있던 재무장관 네케르를 파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가 진압을 위해 파리로 들어온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시민들은 무장을 하고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7월 14일, 바스티유가 무너지다
1789년 7월 14일, 수만 명의 군중이 보훈병원에서 무기를 탈취한 뒤 탄약을 구하러 향한 곳이 바로 바스티유 감옥이었습니다.
바스티유는 원래 백년전쟁 시절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였어요. 8개의 탑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건축물로, 17세기부터는 정치범과 종교범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됐습니다. 시민들 눈에는 이 견고한 석조 요새가 왕정의 억압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였어요.
흥미로운 사실은, 막상 문이 열렸을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는 단 7명뿐이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위조범이나 정신질환자 같은, 혁명과는 별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바스티유 함락이라는 사건 자체가 절대왕정의 시대가 끝났다는 강력한 상징이 됐으니까요.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6세가 “폭동인가?”라고 묻자, 측근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니오 폐하, 이것은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정확한 진단이었죠.
사치의 누명을 쓴 왕비 —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사치로 나라를 망친 왕비”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하게 남아있죠.
하지만 최근 역사 연구에서는 이런 평가가 다소 과장됐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어요. 그녀에게 씌워진 사치 스캔들 중 일부는 사기꾼 무리가 꾸며낸 누명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물론 왕실의 화려한 생활이 민중의 분노를 키운 건 사실이지만, 혁명의 모든 책임을 그녀 한 사람에게 돌리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비난이 쏟아지면서, 정작 진짜 원인이었던 흉작과 빈곤, 정치 구조의 문제는 가려지기 쉽다는 것을요.
혼란의 도시에서 질서의 도시로 — 오스만 도시개조
바스티유가 함락된 이후로도 파리는 한동안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까지 연이어 터지면서, 파리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매번 시위대의 바리케이드로 변했어요. 골목 하나에 마차 두 대만 엎어놓으면 군대조차 진입이 불가능했다고 하니,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이 미로 같은 거리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현대적인 도시를 경험했던 그는,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파리를 통째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어요. 그리고 이 거대한 사업의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이 바로 오스만 남작입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간 파리 시장을 지낸 오스만은 파리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계했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없애고 곧고 넓은 대로를 뚫었고, 상수도와 하수도 체계를 갖춰서 위생 문제도 해결했어요. 기차역과 주요 광장을 직선 도로로 연결하고, 건물 높이와 외관까지 통일시켰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그 균형감 있고 우아한 파리 거리, 바로 이때 만들어진 거예요.
물론 당시 파리 시민들은 막대한 공사 비용에 불만이 많았다고 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스만의 파리 개조는 대성공을 거뒀고, 15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그 도시 구조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게 정말 놀랍습니다.
혁명과 재건, 두 얼굴의 파리를 보며
오늘 파리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느낀 건, 지금의 아름다운 파리 뒤에는 굶주림과 분노, 피로 얼룩진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화려한 대로와 우아한 건물들을 보면서 그 이면의 역사까지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저도 이번에 공부하면서 처음 제대로 알게 됐으니까요.
바스티유 광장에 가면 지금은 그 옛날 감옥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대신 우뚝 선 7월 혁명 기념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죠. 언젠가 그 광장에 서서, 혼란과 재건을 모두 견뎌낸 이 도시의 시간을 가만히 느껴보고 싶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20세기가 남긴 현대 파리의 풍경을 함께 걸어볼게요. (시리즈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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